상단영역

본문영역

[소설로 쓰는 역사] 충장공 남이흥 비장한 순국 <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입력 : 2015.09.06 17:49
  • 기자명 By. 충청신문
글/ 남균우
 
2부. 성장 
 
‘서명선 근선 노량유허비문’
 
빛나고 또 빛나는 공과 높고 또 높은 절개로다. 지난 역사를 헤아려 볼 때 누구도 여기에 따라가는 자 흔치 않도다. 여기에 다만 남유가 있어 공(功)과 절개를 함께 갖추었도다. 끊임없이 교활한 왜적(倭賊)은 우리 땅을 뚫으려고 8년 동안의 병화로 여러 고을에 상처를 입혔으나 공(公)이 그 무를 분발하여 먼저 휘하 일에 탄식하고 동교(東橋))에서 공격하니 적은 이에 못 견디어 물러가고 公은 신기를 비품 없이 펴서 더러운 가운을 신속히 쓸어 버렸도다. 이어 공(公)은 저 노량바다에 둔을 치고 매가 새를 쫓아내듯 열 척의 배가 밤에 정벌에 나서니 하늘에는 조각달만 떠 있고 긴 바람은 물결을 깨치도다. 공은 출몰(出沒)하는 귀신과 같아서 왜적들의 배를 태워버리니 물고기까지 탕진하였네. 고래가 도망가고 악어가 물러가니 바다는 훤히 넓어지고 하늘이 밝아졌네. 농부는 손에 그 농기구를 쥐고 장사꾼들은 그 재물을 내놓으니 마침내 이 공(公)과 더불어 한 번의 죽음으로써 나라에 화평(和平)을 다시 돌아오게 하였네. 수양(睡陽 : 당(唐)나라 때 장순?허원(張巡?許遠) 두 충신이 죽은 땅)의 절개 자의(子儀: 당(唐)나라 안사(安史) 난리에 공을 세워 분양왕을 봉했음)의 공과 같도다. 세월은 삼갑(三甲)을 돌아서 이때를 기다렸도다.
 
높은 비에 새겨서 공에게 보답함에 게으름이 없게 하리니 상해(桑海)는 다함이 되어도 해와 달은 항상 빛이 나도다. 범백을 갖춘 군자(君子)들이여 이 명장(銘章)을 볼지어다.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
 
춘추관사 서명선 근선.
 
그리하여 지방사민(地方士民)의 열규로 발의되어 경향을 막론하고 노량에다 유허비를 세우기로 하고 남유가 순국한 후 3주갑(180년)이 되어서 서명선(대제학 서명응의 아우, 호는 동원)의 명으로 비로소 비를 건립한다.
 
■1601년(26세) 
 
아버지의 3년 상을 벗고 골수에 사무치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글 읽기를 중단, 무술연마를 시작 정진했다. 그런데 남이흥은 여력(척골의 힘)이 있어서 빨리 활을 쏘아도 맞지 않는 일이 없었고 남이 한 번 쏠 때 2, 3발을 쏘았는데도 맞지 않는 일이 없었다.
 
그는 시문에 뜻을 두지 않았어도 재질이 뛰어나 많은 좋은 작품을 남겼으며 글씨도 명가필보에 들어 있을 정도의 명필이다. 
 
■1602년(27세) 무예 연마 1년에 문묘(성균관)를 중건하고 그 기념으로 임금께서 친히 뽑는 알성무과(謁聖武科)에 급제했다.
 
■1603년(28세) 선전관 겸 비변사 랑청(郎廳)에 뽑혀 관직을 시작했다. 
 
■1604년(29세) 장현 현감으로서 가혹한 정사의 뿌리를 뽑고 아전들을 엄히 다스려 현민들에게 태평성대를 누리게 했다. 
 
이것을 안 안문사가 장계를 올려 이를 안 선조께서 친히 상(표피를 하사했다)을 내리셨다.
 
이때 이지완이 황해도를 순행한 다음 보고한 내용에 보면 장현 현감 남이흥은 나이 젊은 무부로서 마음을 가다듬어 백성을 잘 다스림으로써 치적이 퍽 소문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유사록) 
 
■1606년(31세) 감사와 뜻이 서로 맞지 않았음으로 사직하고 집에 돌아와 있었으나 이 해에 비변랑이 되다.
 
■1608년(33세) 의주판관(종5품)을 제수 받는다. 이때는 직책 그대로 관청의 잘못을 감독한 일이 있었는데 3년간에 걸쳐 전부터 쌓여 있는 적폐를 깨끗이 제거 변방의 인심을 일신 시켰다. 
 
이때 이이첨이 부윤으로 있으면서 극진한 후의로써 남이흥을 대접하였으며, 이곳을 떠날 때는 ‘남통판 부용천을 송별함’이란 시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 성품은 편벽됨이 많은데
 
그대 재질은 유독 높이 뛰어났네.
 
성을 지킴에는 대절을 함께 기약하였기로
 
부(俯)를 나누는 데는 번거로움을 덜었네.
 
후일을 기다려 서주가 감화됨을 볼 수 있을 것이며 
 
어찌 북쪽 오랑캐의 교만함을 근심하리.
 
백성들의 뜻으로 도사를 사양하고 
 
더 큰 벼슬을 꿈꾸었도다.
 
군사를 주둔한 것은 전략에 의하고 
 
어진 이웃은 뛰어난 풍모를 우러러 보네.
 
떠나는 자리에서 몇 번이고 옷자락을 잡았는데
 
<계속>
저작권자 © 충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충청신문기사 더보기

하단영역

매체정보

  • 대전광역시 중구 동서대로 1337(용두동, 서현빌딩 7층)
  • 대표전화 : 042) 252-0100
  • 팩스 : 042) 533-7473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황천규
  • 법인명 : 충청신문
  • 제호 : 충청신문
  • 등록번호 : 대전 가 00006
  • 등록일 : 2005-08-23
  • 발행·편집인 : 이경주
  • 사장 : 김충헌
  • 「열린보도원칙」충청신문은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 노경래 (042-255-2580 / nogol69@dailycc.net)
  • Copyright © 2024 충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ilycc@dailycc.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