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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쓰는 역사] 충장공 남이흥 비장한 순국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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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5.09.02 20:48
  • 기자명 By. 충청신문

 

2부. 성장

글/ 남균우

 

 

 

남이흥은 1576년 7월 27일 서울에서 의천부원군 남유(南揄) 장군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질(氣質)이 뛰어나고 체격(體格)이 장대하였으며 비범함을 보였다고 한다. 5〜6세가 되면서부터는 아이들이 노는 곳에 가면 항상 높은 곳에 올라 앉아 좌우(左右)를 지휘하고 영도하였다. 이에 아이들은 거역하는 일이 없이 순종(順從)하였다고 하니 위대한 인물의 품성이 이때부터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외조부인 형조판서 전주 유씨 훈(塤)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을 두었는데 남이흥의 어머니는 막내였다. 외조부 형조판서께서 종애(鍾愛 : 한곳으로 몰린 사랑)를 하여 손자인 남이흥을 항상 자기 집에 와서 놀게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여섯 살 때이다.

외가에 가서 외종형 및 동네 아이들과 우물가에서 놀다가 열 살의 외종형이 우물 언덕에서 미끄러져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이 때 남이흥이 황급히 소맷자락을 잡고 축대에 두 발을 붙여서 버티고 서서 사람들을 크게 불러 구출하였는데도, 철모르는 다른 아이들은 곁에서 웃고만 있었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외조부인 형조판서 유훈(柳塤) 대감은 이 아이는 앞으로 나라의 위태로움을 붙들어주는 큰 재목이 될 것이라고 칭찬을 하였다고 한다.

세가 되었을 때는 문한가(文翰家)로 장가를 들어 수학하고 있었는데 사관이 쓴 태사서 등 많은 책을 열심히 읽었다. 이러한 그의 재질과 열성을 보고 같이 배우는 친구들은 그가 후에 큰일들을 능히 할 수 있으리라고 칭송을 했다고 한다.

그 무렵 아버지 남유는 한필의 준마를 기르고 있었다. 그 말(馬)은 성정이 사납고 날카로워서 아무도 훈련을 시키지 못했다. 오직 남이흥만이 매일 밤 말을 타고 달리기를 시켜 말을 단련시켰다.

이때 말을 지키는 자가 그러기를 중지하도록 애원했으나 남이흥은 막무가내로 듣지 않았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앞으로 전쟁에서 긴히 쓰일 것이라 하니 모든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고 비웃기만 하였다 한다.

그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그의 아버지가 부평부사로 참전하여 몰려온 왜적과 싸울 때 그 말의 힘을 입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남이흥이 열일곱 살(1592년) 때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왜적이 삽시간에 서울에 침입하였고, 당시 위로 임진강까지 난이 확대되어 선조 임금은 의주로 파천(播遷)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서울은 질서를 잃은 채 소란과 아우성의 도가니였다. 어머니를 모시고 부평에 있던 남이흥은 어머니가 서울 본가에 두고 온 세전 가장을 가져올 수 없음을 탄식하는 것을 보고 찾으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서울은 지금 난리 통이라 인심이 흉흉하니 어찌 그 물건이 그대로 있을 것인가? 있다한들 위험을 무릅쓰고 갈 수 있겠느냐?"면서 극구 말렸다.

남이흥은 웃으면서, "자식 된 자로서 어떻게 바라만 보고 있겠습니까. 소자가 무사히 다녀올 것인즉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하고 건장한 하인 수명을 거느리고 한양성 내로 들어갔다.

본가에 들어간 남이흥은 다행히 가지러 간 물건이 그대로 있었기에 물건을 챙겨 돌아오는데 길은 피난민들로 메워져 있었다.

이때 도적떼 수백 명이 나타나서 피난길의 난민들을 위협하고 약탈하기 시작했다. 이를 본 남이흥은 말을 달려 앞으로 나아가 도적떼 중 맨 앞에 선 놈들에게 계속 활을 쏘면서 큰소리로 호령하여 꾸짖으니 뒤따르는 도적떼들은 겁을 먹고 흩어져 도망치고 말았다. 이런 험악한 처지에서 남이흥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난 피난민들은 놓칠세라 앞을 다투어 그의 뒤를 따랐다.

이때 남이흥은 나이 17세의 백면(白面)소년인데 수백 명의 무뢰배를 혼자 감당하여 많은 사람들을 험지에서 구해낼 정도의 남다른 기개와 담력이 있었다고 하니 누구에게도 비길 수 없는 출중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남이흥의 아버지 남유(南瑜)는 무과에 올라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아버지 남유는 부평부사 재직 시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관군장으로 참전하여 왕사를 돕고 국난을 극복하는 데 헌신하였다. 남유가 임진강 전투에서 왜적과 싸웠는데 이때 사용한 말은 아들인 남이흥이 연마시킨 말이었다고 하니 남이흥의 어려서부터 매사에 치밀한 유비무환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아닌가 여겨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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