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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남균우
1부 만남
나는 2002년 11월 22일에 전남 화순에서 전국 시도 지역 문학인 교류대회가 있다는 안내장을 문협 전남 지부장 황하택 씨로부터 받고 서울지역의 문인자격으로 참석을 했다.
그간 나는 광주를 방문한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에 잘된 일이라고 생각, 기대를 가지고 광주에 갔다.
마침 개회시간이 22일 13시이기 때문에 11월 21일 24시 30분에 용산에서 출발하는 무궁화호를 타고 광주역에 도착하니 새벽 5시경이었다.
개최 시간까지는 시간여유가 많았다.
광주는 처음 오는 곳이라 관광할 곳이 많았지만 다 제쳐놓고 내 직계 조상과 관계가 깊은 충민사(忠愍祠)를 찾기로 했다.
충민사를 건설 할 당시(72.8.23〜85.10.21)의 공문서에 의하면 소요액이 10억이라고 기록이 됐고, 실제로는 김준 장군을 함께 충민사에 배향(配享)해야 한다고 정읍 유지들이 건의한 관계서류의 기록에는 27억이라는 거액을 들여서 대규모로 사당을 지어 성역화 시켰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렇게들 모르고 있으니 이렇게도 관심이 없는 것인가 의아스러웠다.
그러나 시간은 사정없이 흘러서 8시가 되었다. 직장인들이 출근을 하고 학생들이 등교를 하느라고 버스, 택시, 트럭 등 차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붐빈다.
그때 마침 나이가 지긋한 노인 한분이 스틱을 짚고 배낭을 메고 지나간다. 등산을 즐기는 분이라면 충민사를 알고 있으리란 생각에서
“아저씨 충민사를 아시나요?”
“예 압니다.”
“어떻게 가면 됩니까?”
“충민사를 가시는군요. 충민사를 가시려면 여기서 777-1을 타고 50분 정도 가시면 그곳이 나옵니다. 바로 길가에 있기 때문에 찾기가 쉽습니다. 나도 마침 그곳을 가는 길이니 같이 가시지요?”
나는 노인을 따라 777-1번 버스에 올라탔다. 그리고 한참 가다 나는 그 노인의 안내에 따라 버스에서 내렸다.
가까운 거리에 웅장한 충민사의 정문이 시야에 들어왔다.1)
나는 이전에 소문으로 들었었다. 즉 전두환 대통령이 전남지사에게 지시해서 광주시 무등산 입구에 자신과 같은 천안 전씨로 자신의 직계조상인 전상의 장군의 사당을 거액을 투자하여 조성, 성역화 시켜놓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었던 것이다.
그 규모가 거의 현충사만큼이나 규모가 클 것으로 기대했으나 현충사와는 비교가 안됐으나 그런대로 규모가 대단히 웅장하고 컸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당의 이름은 왜 ‘충민사’라고 붙였는가 하는 것이며 그것을 안 사학계(史學界)에서 그 부당함을 지적했으나 시정이 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어서 더욱 관심이 갔던 것이다.
역사학계의 지적은 충민사는 평안남도 안주에 있는 사당으로 남이홍 장군 등 정묘호란 때 안주성 싸움에서 나라를 위해 순절한 분들을 모신 사당으로 1684년 임금으로부터 정려(旌閭)의 명을 받았고 대원군 서원 철폐시에도 보존된 전국에 남아 있었던 47개의 서원 중 하나이다.
<계속>
글쓴이 서계 남균우(南均祐)는
당진에서 태어나 서산중앙고와 동국대학교 법과대학을 나왔고 35년간 교단에 선 교육자다. 1999년 정년퇴임을 한 뒤 시와 소설을 쓰고 있다. 계간 ‘시세계’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시인이자, ‘문학세계’ 신인문학상 소설부문에 당선돼 등단한 소설가이기도 하다.
광주시에 있는 충민사를 찾았다가 일반인들이 충민사를 잘 모르는 것 같고, 더구나 정묘호란 때 순국한 남이흥 장군이하 휘하의 수많은 장수와 군관민들의 장렬한 순국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것으로 느껴져서 ‘충장공 남이흥’ 이야기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미약한 글이지만 최선을 쏟을 것이다. 이 글이 남이흥 장군의 애국정신과 혁혁한 행적을 알리는 일에 기여하는 첫걸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