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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슬픔의 나무 밑에 갈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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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5.08.25 17:35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이 정 희 시인·둥그레 시 동인 회장

이스라엘에 가면 슬픔의 나무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음이 울적할 때 입던 옷을 걸어놓고 나면 슬픔이 가라앉는다는 속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는군요. 가다 보면 자기처럼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찾아온 사람들을 만나는데 얘기를 들어보면 자기보다 훨씬 더 사연이 많은 것을 알게 되고 민망한 마음에 걸어둔 옷을 다시 입고 돌아온다고 합니다.

나만 슬프고 외로운 줄 알지만 대부분 착각입니다. 유형이 달라 그렇지 누구든 마찬가지라는 거죠. 남은 늘 행복해 보이고 자기는 언제나 불행해 보입니다. 남이 행복해 보인다면 그 사람 눈에는 나도 행복해 보이련만 나만 불행하다고 여기는 게 가장 큰 불행입니다. 마음이란 늪 같아서 한 번 그런 생각이 들면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듭니다. 불행이나 슬픔도 한 꺼풀뿐이고 한 겹 막을 걷어내면 기쁨과 행복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잊고 삽니다.

엊그제 고추장을 뜨러 갔다가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었죠. 보통 열흘 간격으로 작은 단지에 떠다 놓고 먹는데 마침 바닥이 나서 장독에 올라가 보았더니 그 동안에 두꺼운 막이 한 층 생겼습니다. 한여름 땡볕에 바짝 말라 버린데다가 간간이 습한 날씨에 곰팡이까지 끼었습니다. 탈이 난 줄 알고 급히 파 보았더니 속속들이 빨갛게 잘 숙성된 고추장이 숟갈에 묻어나지 않겠습니까.

해마다 겪는 일인데 깜빡 잊은 겁니다. 장마가 오기 전에는 스무날 가까이 쨍쨍한 볕이 내려쬐고 그와 함께 약이나 오르듯 빨갛게 무르익은 고추장은 최고의 맛이었지요. 얼마 후 장마와 함께 색이 바뀌지만 그 밑에 여름내 숙성된 고추장이 들어앉아 있었는데 오늘처럼 무심코 뜨러 갔다가 놀라는 것처럼 기쁨과 행복도 슬픔과 불행으로 한 겹 덮인 걸 몰랐습니다.

우리 한 겹도 덮이지 않은 채 곧장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만 그러다 보면 슬픔과 불행의 나무에 열리는 열매의 진수를 알지 못합니다. 고추장 같은 경우 봄에는 께름칙한 막을 걷어내지 않고도 곧장 뜰 수 있었으나 지금 약간은 지저분한 막을 걷어내고 먹을 때가 훨씬 맛있다는 거죠. 똑같은 탄소덩어리인 다이아몬드가 숯보다 값진 것은 땅속에 묻혀 있기 때문인 것처럼 불행과 슬픔의 막에 파묻혀 숙성될 때가 진짜라는 뜻이었지요.

솔직히 행복하다고 행복한 건 아니지요. 행복할 건 없지만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찾아내는 겁니다. 온통 모래알뿐인 백사장에서 조금 크고 빛나는 사금을 발견하는 그런 기쁨이라면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내는 과정도 괜찮습니다. 암흑과 어둠 때문에 빛이 더 찬란한 것처럼 절망 속에서도 꿋꿋한 마음은 더없는 소망입니다. 고통은 기쁨을 향해 나가는 제 1 관문이었으니까요.

눈감으면 가지에 걸어둔 옷이 펄럭입니다. 나무는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둔 옷 때문에 휘청대고 부러지기도 했을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찾아가 옷을 걸면 근심은 덜어졌을지 모르나 얼마 후 다시 슬픔에 잠길 테니 늘 역부족일 테고 걸어두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습니다. 슬픔을 덜어내는 방편이라지만 그 나무도 슬픔 속에서 자랐다면 뾰족한 수가 있을 것 같지 않군요. 걸어두면서 슬픔이 가중될 수도 있을 테니 나무 밑에서 잠깐 마음을 가라앉히는 걸로 끝나는 게 좋겠지요.

나무를 처음 생각해 낸 누군가도 자기만 외롭고 슬프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그런 착상을 했을 거예요. 병원에 가 보면 나보다 아픈 사람이 더 많은 것처럼 그 나무 밑에는 자기보다 커다란 슬픔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몰려올 테고 그럴 때마다 자기 슬픔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걸어둔 옷을 입고 내려갔을 테지요.

언젠가 진주로 만들어진 천국 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무척 화려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문이 아름다운 것은 힘들게 만들어진 과정 때문인 걸 알았습니다. 천국은 또 천국뿐이 아닌 소망과 목표를 말한다면 그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진주의 생성 과정보다 더한 고통이 수반되겠지요. 어둠을 깨고 나와야 새벽이 된다는 건 고통과 함께 배가되는 기쁨, 즉 둘의 함수관계를 나타냅니다. 2차 대전 때 지옥의 아유스비츠에서 죽음의 공포를 이기고 살아난 사람은 똑똑하거나 명석하지도 않은, 오로지 소망을 바라보며 견딘 사람들인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풍랑을 두려워하지만 바람이 없으면 배가 어찌 나가랴 싶군요. 지금의 증기선은 바람이 없어도 나갈 수 있으나 바람이 불면 그 탄력성 때문에 더 쾌속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은 돛배와 다르지 않습니다. 고통은 달갑지 않은 것이나 그로써 원만한 삶이 됩니다. 기쁨의 열매는 슬픔의 나뭇가지에 달립니다. 이물질을 떼어낼 수 없어 분비물을 토해낸 뒤 감싸 안으면서 형성된 게 진주라면 온몸으로 고통을 감수할 때라야 최고 아름다운 경지가 나오지 않을까요. 우리 추구하는 모든 아름다움은 또 그렇게 피하고 싶어 하는 고통으로써만 형성되는 섭리를 거듭 새겨봅니다.

이 정 희 시인·둥그레 시 동인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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