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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어떤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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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5.07.28 18:06
  • 기자명 By. 충청신문

오늘도 찌는 듯한 날씨군요. 소나기라도 한줄금 쏟아지면 시원할 텐데 지분대기만 하니 불쾌지수는 높아지고 짜증스러울 때가 많지만 우연히 목격한 광경 때문에 잠깐 더위도 잊었습니다.

오늘 도서관을 다녀왔습니다. 가다 보니, 예의 아파트 건물이 나오고 그 뒤로 허름한 빌라 서너 채가 있더군요. 얼핏 지나는데 헙수룩한 노인 한 분이 창문을 두드리면서 “에미야, 문 열어라” 하고 부르지 않겠습니까. 곧 이어 “네, 나가요 아버님”하는 소리와 함께 찰칵 문 따는 기척이 나고 노인은 곧장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순간 망연한 기분이었습니다. 나갔던 사람이 문을 열어달라는 건 흔하지만 아직은 이른 시간이고, 작업복 차림에 더 그랬던 거죠. 필연 인근의 밭에서 일하고 오는 중인 것 같고 얼핏 홀시아버지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추측이라 해도 민망하긴 했으나 그럴 경우 문을 열어주기로 말하면 할머니라야 맞겠죠. 잠깐 출타 중이거나 여행을 간 것도 같지만 허름한 집을 보면 그렇지는 않은 성 싶고 십중팔구 먼저 세상을 떠났을 거예요. 무시하는 건 아니고 속단일 수 있으나 가난한 중에도 단란하게 사는 모습이 더 인상적으로 그려진 것입니다.

무엇보다 늘그막에 자식한테 얹혀 살면서 푸성귀나마 가꾸는 것 같아 마음이 짠하군요. 기껏 상추 아니면 호박과 쪽파 아욱 정도겠지만 나름대로 그렇게 역할을 한다고 여기며 지낼 테지요. 필경은 날씨가 덥다고 새벽부터 일하다가 돌아왔으니 대충 씻고 아침 겸 점심을 먹을 텐데 바로 그 며느리가 내 온 밥상의 메뉴가 궁금해집니다.

우선 국만 해도 밭에서 뜯어온 아욱으로 끓이지 않았을까요. 반찬이라야 열무김치와 상추 겉절이 쑥갓무침과 호박전과 멸치를 볶아 놓은 정도겠지요. 호사를 부린대야 갈비탕과 생선조림 아니면 밭 한 모퉁이 타고 올라간 더덕나물과 장아찌가 전부겠지만 순박한 노인은 자기가 가꾼 채소반찬으로도 만족할 것 같습니다. 오후에 다시 그 곳을 지나다가 따비밭에서 풀을 뽑는 노인을 보았거든요. 공터에는 아파트 건물의 오수와 폐수가 흐르는 개천이 있고 거기 자갈밭을 일궈 내가 상상했던 푸성귀를 조목조목 심은 겁니다.

추측이 맞아 떨어진 것에 대한 쾌재보다는 생면부지인 내게 그런 이미지를 준 배경이 안쓰럽군요. 며느리만 해도 경위야 어쨌든 힘들게 모시고 사는 정경이 떠오릅니다. 남모를 고충도 있을 것이나 그래도 끼니마다 뜨신 진지와 시아버지가 가꾼 푸성귀로 반찬을 지어 올릴 것 같습니다. 텃밭 농사라 규모가 오죽할까 싶고 혹 사 먹는 게 편하다고도 했으련만 그 마음을 헤아리면서 봉양할 테니 흐벅진 정경이군요.

오후에는 잠깐 교회에 들렀습니다. 제가 교인들에게 저녁식사를 대접하기로 했거든요. 칼국수를 준비하고 개떡을 쪘습니다. 팥죽과 감자 부침개를 곁들이고 과일을 담아 내니 푸짐한 별식이 되었습니다. 이윽고 다들 모여 식사를 끝내고 설거지를 하는데 윤서가 주방으로 와서는 엄마가 쑥개떡을 좋아한다면서 싸 달라고 청을 넣었습니다. 엄마는 직장 때문에 오지도 못했는데 11살 난 딸이 남은 것을 달라는 바람에 묘한 기분이었죠.

며칠 후 그 얘기를 했더니 그 엄마 빙그레 웃으면서, 집에서도 청소를 하고 동생을 건사한다고 그래 직장을 다니기가 수월하다고 하더군요. 지쳐 보이는 얼굴인데도 행복한 웃음을 보며 그런 게 삶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풍족한 게 전부는 아니었지요. 온갖 제육이 집안에 가득해도 다투는 집안이 있고 마른 떡 한 조각만 먹어도 화목한 집안이 있다면 그 두 집안이 아닐까 싶고 그 원천은 다름 아닌 효라고 보았습니다.

아침나절 문을 열어 주던 젊은 새댁이 떠오릅니다. 내가 본 바로 그 집도 넓지는 않았습니다. 방도 많아야 세 칸일 테고 시아버지가 차지하면서 더 옹색해졌겠지만 에미야 문 열어라 하고 거침없이 말하는 걸 보면 순박한 며느리는 직접 심어 가꾸는 보람을 느끼게끔 존중해 온 것 같군요. 늘그막에 함께 살면 자식도 어렵다는데 아들 내외가 무던했나 봅니다. 노인 역시 역할을 한다고 가꾸는 것이되 앞서 말한 것처럼 푸성귀뿐이고 아들 내외는 무리하지 말라고 짐짓 다그쳤겠지만 어려운 속에서 공경해 주는 게 미안해서 더 소일거리를 찾았을 거예요.

엄마와 남동생과 단칸방에 사는 윤서를 봐도 극히 소박한 효가 그려집니다. 엄마가 직장에 나가면 동생을 깨워 아침을 먹고 나란히 학교에 갑니다. 집에 와서는 저녁밥을 안친 뒤 숙제를 하면서 엄마를 기다리겠지요. 일에 지쳐 끙끙 앓는 걸 보면서 철이 들었나 싶고 젊은 엄마는 그래 힘들어도 견딜만 했겠지요. 철부지 효도라고 해 봤자 맛난 게 있으면 드리고 싶어 하는 정도였으나 딸이 있어 보람을 느낄 테니 그 또한 행복이었죠.

진정한 효도는 과연 무엇인지 당혹스러워지곤 했으나 오늘 소박한 효심을 보고 느낀 게 많았습니다. 정갈한 의식범절은 물론 마음까지 편하게 해 드리는 게 효의 본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넉넉한 살림은 아닐지언정 공경하는 자세로 일관할 테니 그게 진정한 효가 아닐는지요. 여건 때문에 효도 한 번 제대로 못했다고 생각한 자신을 새삼 돌아본 거죠. 부모님은 돌아가셨지만 최근 드물게 보는 애틋한 효심 때문에 모처럼 마음이 촉촉해진 하루였습니다.

 

이정희 시인·둥그레 시 동인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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