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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백로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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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5.07.14 18:09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이 정 희 시인·둥그레 시 동인 회장

벼 포기가 한껏 어우러졌다. 땅내를 맡고 푸르러진 게 엊그제 같아 감회가 새롭다. 하기야 7월도 벌써 중순에 접어들었다. 8월 초에는 이삭이 나올 테니 마음이 뿌듯하다. 농사를 짓지 않는 제 3자의 마음도 이럴진대 아침 저녁 바라보는 농부의 마음은 어떨지 짐작이 간다.

저만치 백로 한 마리가 소나무 가지에 내려앉는다. 하야로비라고도 하는 아름다운 이름 그대로 양쪽 날개를 착 붙이고 긴 다리를 흠씬 접으면서 내려오는 게 능숙한 무희처럼 날렵해 보인다. 소나무의 푸른 잎과 새하얀 날개가 무척 상큼해 보인다. 솔숲 뒤 떠가는 구름도 얼마나 정겨운지 한폭 그림처럼 곱다.

이어서 날개 치는 소리와 함께 개울로 내려앉는 기척이 들렸다. 다급한 기색으로 철벅철벅 물속을 헤집더니 목을 움츠리고는 물속을 들여다본다. 7월의 무더위 속에서 논 가운데를 오락가락하는 백로보다 인상적인 풍경이 또 있을까마는 신선처럼 앉아 있던 모습에 비해 어쩐지 낯설다. 나뭇가지에 내려앉을 때 활짝 펼쳐지던 날개도 오종종하니 작고 눈부신 깃털과 고상한 자태는 간 데 없어 잠깐 속은 것 같은 기분이다.

하지만 백로는 얼마 후 아까처럼 소나무 가지에 내려앉았다. 그리고는 예의 다리를 포개고 서성이는데 멀찍이서 보니 뜻밖에 하나로 겹쳐져 있다. 잠시 전에도 그런 모습이었을 텐데 이제야 비로소 발견한 느낌이다. 쉴 때와 먹이를 찾아 날아갈 때의 모습이 다른 걸 보니 매양 고귀할 수만은 없는 것일까. 소나무에 앉기만 할 수 없는 약점과 물고기를 찾아다닐 수만도 없는 자존심을 생각하면 두 컷으로 나타난 풍경은 그렇게 당연했다.

문제는 소나무 가지든 물가든 어느 곳에 더 많이 내려앉느냐 하는 것이되 보는 사람 자신이 현실적이라면 물가에 더 자주 간다고 할 것이다. 아울러 이상적인 기질은 소나무 가지에 더 자주 앉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배부르지 않으면 신선도 무의미해질 때 물가에 자주 갈 것 같은 생각도 빗나가지는 않는다.

우리 삶도 비슷한 범주에 들어간다. 생활에 매여 사는 것은 물가를 서성이는 백로의 모습이고 이상을 좇아 꿈꾸는 것은 어쩌다 소나무에 내려앉는 모습으로 볼 수 있겠다. 물가에서 혹은 나뭇가지에서만 살기 힘든 게 두 가지 모두 필수적 요건이었다. 고상한 삶을 위해서는 꿈도 있어야겠지만 생활도 절박한 문제다.

적당히 현실적이고 여유로운 삶은 우리 모두 추구하는 바였으나 그를 위해서는 나름대로 구분이 필요하다. 일상에 파묻혀 지낼 동안 아취를 생각하다 보면 착오가 생기고 여유를 즐기면서 일에 집착하는 것은 휴식을 취하는 의미가 없게 된다. 휴식을 통한 충전이 아니고는 삶에 치중할 수가 없고 아취에만 젖어 살아도 허기진 백로는 상상이 어려울 테니 적절한 조화가 관건이다.

백로가 편히 앉아서 쉴 때와 날아갈 때의 모습이 전혀 다른 것도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고 싶다. 여타 새들보다는 해사하게 생긴 것 때문에, 이른바 고상한 것일수록 명확하게 구별되는 뭔가가 필요한 걸까. 배가 부른데도 물가를 배회하는 것은 남우세스럽지만 적당량을 채운 뒤 나뭇가지로 날아가는 것은 잠시 전에 이미 보았다. 논에서는 흙물이 튈 수밖에 없으나 마음은 싱그러운 하늘과 푸른 숲 속에 머무른다. 꿈만 먹거나 생활에 매여 살 수는 있다 해도 구분이 뚜렷치 않으면 뒤죽박죽이 된다.

생활 속의 아취도 바쁜 가운데 찾는 한가로움이다. 여건이 따라야 하는 만큼 물가보다는 소나무에서 품격이 더 드러나겠지만, 백로 같은 경우 쉴 자리라 해도 가까운 소나무인 것은 우정 짬을 내야 되는 특별한 공간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의미다. 나 자신 고상하지도 생활에 철저하지도 못한 것을 볼 때 두 가지 연출이 가능한 하야로비는 참 멋있구나 싶다. 지금은 장마철이고 축축한 날개는 힘들겠지만 그런대로 여유롭게 보인 것은 자기 절제로 비롯된 운치였을 것이다. 우리 상황에 견주면 힘든 속에서 찾아내는 여유일 테니까.

눈을 드니 다시금 날아가는 백로가 보였다. 허공에서는 하늘색과 흰색의 조화가 곱고 나뭇가지에서는 초록과 어우러진 배경이 곱다. 먹이를 찾는 게 아닌 하늘을 유유히 선회하는 것인데 날개 뒤에 펼쳐진 군청색 하늘이 문득 써늘한 물결로 다가온다. 우리 바라보는 하늘은 날개가 아프도록 헤엄쳐 가야 하는 물결이었다. 환상 속에 동경해 온 비상도 한 마리 새로서는 힘들겠구나 싶지만 그래서 푸른 하늘을 오르내릴 수 있다. 여유니 아취니 하는 것도 힘든 속에서 잠깐 누리는 특권이다. 우리도 늘 곤하지만 그로써 윤택한 삶이 된다면 바쁘고 분주할수록 찾아 즐길 수 있어야겠다. 장마철일수록 새하얀 날개가 두드러져 보이는 논가의 하야로비처럼…….

이 정 희 시인·둥그레 시 동인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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