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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어느 날 또 다른 세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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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5.06.30 17:49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이 정 희 시인·둥그레 시 동인 회장
돌 틈으로 아이비 덩굴이 우거졌습니다. 휴지와 깡통만 굴러다니는 곳에서 참기름이나 바른 듯 반짝이는 잎을 보다니 가슴이 다 짠합니다. 너비라야 두어 뼘 남짓이고 고양이가 블록 담을 타넘어 다닐 뿐인데 참 놀랍군요. 며칠 전 옥탑에 사는 여자가 창밖으로 화초를 버렸다는데 그 중 한 가닥이 뿌리를 내리고 기구한 삶을 살면서 그렇게 감동적인 상황을 연출한 것입니다.
 
우리 집과 이웃 집 사이에 담이 쳐져 있고 바로 그 경계 지점에 사람 하나 간신히 드나들만한 자리였습니다. 처음 한 가닥 나올 때는 쥐가 밟아댔는지 신통치 않았지요. 빈약한 줄기가 뜯길 때는 헌데가 난 뒤통수를 보는 것처럼 민망했는데 얼마 후 세 바퀴쯤 똬리 튼 모양새로 어우러졌으니 그렇게까지 자란 인내와 끈기가 진정 놀랍습니다.
 
답답하고 울적할 때 보면 더 힘이 나곤 했으니 운명적인 만남입니다. 그 풀은 나를 깨우치기 위해 저리 모질게 자라는 걸까요. 하필 고추장을 버무리던 날 앙상한 가닥으로 꽃대가 나온 걸 보았거든요. 땡볕이 내리쬐는 가운데 불을 때서 엿기름을 달이고 펄펄 끓는 물을 함지에 퍼 담아야 했습니다. 대문 밖에 화덕을 걸었으니 장독까지 꽤 먼 거리를 오가며 퍼 나른 뒤 고춧가루와 소금을 넣고 버무리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었죠.
 
잠깐 숨을 돌리느라고 난간에 앉아 있다가 우연히 마주친 겁니다. 그 간 장독을 오가면서 대견하다고는 했지만 꽃까지 피울 줄은 몰랐습니다. 잎이야 그늘에서 자라는 식물도 있으니까 가능하겠지만 꽃은 볕도 들어야 하는데 당혹스러웠습니다. 꽃으로 보기에도 민망할 만치 창백한 빛깔이되 제게는 세상 어떤 화려한 꽃보다 아름답습니다. 거름이 풍족한 정원에서 자랐다면 얼마나 더 아름답게 피었을지 상상이 갔습니다.
 
아무리 봐도 그렇게 자라는 식물은 흔치 않았죠. 어둡고 눅눅한 것은 그렇다 쳐도 하필이면 깨진 시멘트 바닥입니다. 헛간 지붕이나 기왓장 틈새를 비집고 자라는 풀도 있지만 볕은 들었습니다. 비가 오면 촉촉해지는 곳이기에 동냥젖을 먹듯 목은 축일 수 있었지만 볕도 들지 않고 쓰레기뿐인 그 곳은 정말 가당치 않아 보였지요. 그나마 무릅쓰고 꽃까지 피웠으니 의지의 산물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 없는 뭔가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 아침 미나리를 넣어 나박김치를 담갔거든요. 얼마 전 다듬고 난 뿌리를 거름더미에 버렸는데 파릇하게 돋아난 것입니다. 버림을 받고도 길차게 뻗어나가는 기상이 그려집니다. 당연히 버릴 거지만 쓰레기통에 넣지 않고 휙 집어던진 게 민망했습니다. 버려진 곳에서나마 최선을 다해 뿌리박고 꽃까지 피운 걸 보니 아무렇게나 살지는 않을 것 같았습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새삼 돌아본 거죠. 악조건이라 해도 무너진 담장이나 꽃밭 구석에 팽개쳐진 것보다 심하지는 않을 거예요. 힘들어도 볕은 쬐고 살았습니다. 우리가 분주해서 외면한 것일 뿐 마음만 먹으면 별 반짝이는 하늘과 밤이면 빛나는 쪽반달도 볼 수 있었지요. 가령 힘들다고 불평한다면 볕도 볼 수 없이 자란 그들에게 미안할 밖에요.
 
여건은 그런 거였습니다. 제가 눈여겨보고 감동을 받은 것은 가당치 않게 뻗어나간 덩굴과 어기차게 핀 꽃이었습니다. 뿌리박을 동안 비관도 많았겠지요. 아이비는 냄새에 질렸을 테고 미나리 역시도 마찬가지였지만 어려움을 극복해 온 대견한 마음도 있었을 거예요. 꽃이야 화단에나 꽃집에서 언제나 볼 수 있지만 어려움 속에서 크는 것보다 경건한 의지는 없을 테니까요.
 
가끔 자잘한 풀도 올라옵니다. 비좁은 자리라서 가물 때는 크기도 전에 죽곤 하지만 고물고물 자라는 게 볼수록 대견합니다. 혹 죽을지언정 뿌리는 남을 테니 소망을 가질 만합니다. 콩밭에서 콩 난다고 여건에 좌우되기는 하나 때로는 버려진 저들처럼 극복하고 보듬을 수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나약한 사람은 환경에 지배되지만 현명한 자에게는 수단이 됩니다. 자기에게 맞는 여건이 최고 행복이겠지만 어떤 환경에든 스스로를 맞출 수 있는 사람은 돋보입니다.
 
역경에 처할 때는 나를 둘러싼 환경 모두가 불리하게 보일 수 있으나 좋은 약은 몸에 쓰듯이 어려움도 잘만 다스리면 최선의 약이 됩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환경을 탓하기 전에 원하는 여건을 만들고 찾아냅니다. 이상적인 환경이 전부는 아니었거든요. 아담의 타락은 온갖 나무와 꽃이 어우러진 에덴동산에서였지요. 환경 때문에 나쁘게 된 것은 극복하지 못했을 때의 일입니다. 그 날 새롭게 다가온 세상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길이 없다고 타박하기 전에 만들면서라도 나아가는 삶을 구축해 본 것입니다.
 
이 정 희 시인·둥그레 시 동인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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