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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빈 터에서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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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5.06.23 17:43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이 정 희 시인·둥그레 시 동인 회장
빈 터에 흐드러진 것은 노란 민들레였다. 어느 새 6월인데 무더기 무더기 샛노란 꽃이 폭염에 산뜻하니 곱다. 그럴 리가 없겠지 하고 몇 번이나 확인할 정도로 한여름 민들레는 생소했지만 진즉에 피었어야 할 게 이제야 만발한 것 같아 한편으로는 짠하다.

자세히 본즉 근방에 건축 사무소가 있고 자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모르기는 해도 공사를 하는 바람에 갓 깨어난 민들레가 일제히 홍역을 치렀을 테고 어느 날 쌓여 있던 건축자재가 옮겨지면서 뒤늦게 싹을 틔우고 꽃이 피었을 것이다.
 
언니네 집에서 바라 본 야적장의 풍경이었다. 이제 막 쪄먹은 개떡을 거기 야적장에서 뜯은 쑥으로 반죽한 것 때문에 더 감동적인 걸까. 해마다 이맘때면 친정 동기간들이 모여서 개떡을 쪄먹곤 했는데 반죽을 하고 보니 쑥이 약간 부족했다. 어디 뜯을만한 데가 있을까 하고 보았으나 마땅한 데가 없다. 과수원의 쑥이 연하기는 한데 제초제를 뿌렸을 테고 밭둑에는 너무 자라서 약쑥이 되어 버렸다. 적은 대로 그냥 쪄야지 하고 돌아오다가 야적장 구석에 있는 움쑥을 뜯어 반죽에 보탰고 그게 남다른 향으로 맛을 돋웠다.
 
6월도 중순에 어쩜 이런 쑥이 다 있나 싶어 참 재미있었다. 공사장 너머에 밭 한 두럭이 있고 빈 터의 끝이 그 밭둑이었다. 밭주인은 말 그대로 쑥대처럼 자라는 쑥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을 테고 툭하면 낫으로 베어내는 바람에 초봄에나 볼 수 있는 연한 순을 데쳐서 쑥버무리 같은 향을 맛보게 된 것이다. 그 때 손톱만치 나오는 것은 어려서 가늘기만 했던 반면 오늘 움쑥은 통통한데다가 연해서 뜯기도 수월했다.
 
개떡은 찔 때마다 참 맛있게 먹곤 하는데 오늘은 움쑥을 뜯어 보탠 것 때문인지 유달리 독특한 맛이다. 갓 쪄 낸 것을 쟁반에 펴 놓으면 쑥내가 집안으로 가득 퍼졌다. 그 다음 참기름을 바른 뒤 약간 식혀서 먹는데 다들 맛있다고 탄성을 올린다. 독특한 쑥향기 때문에 참기름 냄새도 무색해지는 것 같다. 쑥이 없을 거라고 단념했다면 지금 이 독특한 향기를 맛볼 수 있었을까. 메뚜기도 한철이었으나 시기를 놓쳤다고 손을 놓을 건 아니다. 메뚜기가 한철인 그 때만은 어림없지만 흔할 때는 가당치도 않았을 운치가 혹간 있다. 보잘 것 없다고 등한시하는 게 얼마나 무모한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가끔 제철도 아닌데 피는 꽃은 있다. 초겨울 보면 뒤늦게 핀 개나리와 장미가 눈길을 끌기도 한다. 쑥만 해도 초겨울 어느 날 보면 양지쪽에 다보록하게 올라오는 것도 흔하지만 지금 상황은 다르다. 민들레는 난데없는 건축자재에 깔려 더는 자라지 못하다가 치워지면서 뒤늦게 피었다. 쑥은 또 축축이 낫질을 해대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으나 숱하게 잘리면서 한여름인데도 연하고 향긋한 쑥으로 자랐다.
 
살다 보면 민들레가 건축 자재에 깔리듯 하는 상황이 속출한다. 당연히 모든 게 끝났다고 절망하지만 기다리다 보면 지금 저 화사하게 핀 민들레처럼 언젠가 다시 일어나게 된다. 수많은 민들레 역시 싹은 모두 짓밟혀 죽었겠지만 지금 보는 민들레처럼 다시 일어나는 게 있고 어떤 민들레는 포기를 한 끝에 필경은 뿌리까지 말라 죽기도 한다.
 
지금 저 뒤늦게 살아나 꽃을 피운 민들레는 그나마 참고 견디면서 땅속으로 더 많은 뿌리를 넓히고 그 힘으로 꽃을 피웠다. 쑥 또한 아무리 낫질을 해도 뿌리가 있는 한 살아난다. 우리 역시 뭔가를 잃었다 해도 싹만 잘려나간 것으로 생각하면 희망은 보인다. 두려운 것은 싹이 잘려나가는 게 아닌 그에 대한 포기로 나약해지는 의지다. 싹만 잘려나가는 줄 모르고 포기하다가 끝내 죽어버리곤 하니 그보다 유감이 또 있을까.
 
살다 보면 민들레와 쑥의 경우처럼 나쁜 상황이 도래하지만 희망을 갖고 기다리면 된다. 민들레는 비록 뒤늦게 피었어도 몇 달 동안 파묻혀 있던 것에 비하면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무더기로 피었다고 했지만 솔직히 여남은 포기 남짓이었는데 여름이고 쓰레기에 뒤덮인 공터라서 더 푸짐하게 보였고 경이로웠다. 움쑥은 또 한물 갔을지언정 이듬으로 거둘 수 있는 여지를 드러낸다. 봄에 나올 때의 향 같지는 않았어도 얼마나 연하고 통통했는지를 생각하면 시기를 놓친다 해도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문명도 열악한 조건에서 태어났다. 얼마나 좋은 여건을 찾기보다는 나쁜 여건이지만 어떻게 반전시키느냐가 문제다. 좋고 나쁜 걸 따지기 전에 적응도를 높이는 거다. 악조건은 구름 같아서 바람이 불었다 하면 흩어진다. 구름만 보고 낙심하거나 흩어지기를 기다리기 전에 그 속의 태양을 보는 것이다. 햇살은 눈부시지만 구름을 뚫고 나오는 태양은 더더욱 강렬하다. 먹구름 뒤에는 언제나 태양이 빛난다. 어떤 경우에도 소망을 품고 산다면 먹구름을 투과해서 충분히 볼 수 있다. 오늘 본 민들레와 쑥은 혹 그렇게 꽃을 피우고 움을 틔우지 않았을까. 악조건은 때로 활력소가 된다는 생각에 오늘 하루가 무척 희망적이었다.
이 정 희 시인·둥그레 시 동인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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