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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찔레꽃 가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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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5.06.02 18:46
  • 기자명 By. 충청신문

해가 참 길기도 하다. 7시가 넘었는데도 한나절밖에 되지 않은 것 같다. 아침에 나온 애기가 저녁에 인사한다는 말처럼 도대체 해가 넘어가지 않는 기분이다. 그렇게 지루한 뉘앙스는 또 찔레꽃가뭄을 예견하는 것 같다. 5월 중순 찔레꽃이 필 즈음부터 시작되는 가뭄인데 보통 낮 시간이 가장 긴 하지까지 이어지고 그렇게 가물다가 감자알이 들고 마늘을 캘 무렵에야 마침내 비가 오는 게 일련의 과정이었다.

하필 찔레꽃가뭄이라고 한 배경이 그려진다고나 할까. 이 꽃이 필 무렵은 모내기가 한창인 계절로 이 중요한 시기에 흔히 가뭄이 잘 들기 때문에 그런 이름으로 알려져 왔으나 찔레꽃이라는 예쁜 닉네임을 붙여서 나름대로 가뭄을 극복하는 지혜를 드러내는 것 같다. 새하얀 꽃은 담백하고 깨끗한 느낌인데 하필 가뭄이 드는 시기에 피어 공연히 서글픈 꽃으로 회자된 것은 쓰라린 굶주림을 예견하는 꽃이었기 때문이리라. 찔레 꽃잎을 먹으면 아쉬우나마 허기는 가셨다고 한다. 곧 이어 돋아나는 찔레 순은 달콤하기까지 해서 곤궁한대로 간식거리는 되었다는 것이다.

찔레꽃가뭄과 비슷한 이미지라면 보릿고개가 아닐까. 묵은 곡식은 다 떨어지고 보리는 미처 여물지 않아 가장 어려운 시기를 비유적으로 이르던 말로 대략 음력 3, 4월에 해당된다. 먹을 게 없다 보니 쑥과 밀가루로 만든 쑥버무리와 소나무 껍질로 지은 송기 밥으로 연명하였고, 술지게미와 비지는 물론 풀뿌리도 먹었다고 한다. 그 외에 감꽃을 먹기도 했는데 일제 때 어린 시절을 보낸 80대 이상 노인들은 이른 아침 떨어진 감꽃을 먹기 위해 새벽부터골목에서 기다리기도 했다니 찔레꽃가뭄에 깃든 이야기는 애틋하지 않은 게 없다.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먹던 얘기다. 지금이야 쌀이니 보리 등 곡식이 아니어도 밀가루로 만든 빵이 흔하고 그 외에 각종 기호식품이 넘치는 판이지만 요즈음같이 가뭄으로 곡식이 타들어가는 걸 보면 농사에만 의존해서 시장기를 달래던 시절이라 찔레꽃가뭄 또는 보릿고개는 반갑지 않은 손님처럼 찾아왔다. 제대로 먹지 못해서 목은 삘기같이 늘어지고 누렇게 뜬 얼굴에 배만 부른 기형적인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는 것이다.

배가 고픈 게 뭔지 겪어보지 못한 세대라서 믿기지는 않으나 이맘때면 늘 잠이 모자라 쩔쩔매다 보니 어렴풋이 납득이 가곤 했다. 보통 여름에 접어들고 찔레꽃가뭄이 시작되면서 더위에 시달리지만 나는 그때부터 잠 때문에 곤욕을 치르기 시작한다. 보통 4시부터 부움해지지 않던가. 예민한 탓인지 새벽에는 2시든 3시든 한번쯤은 깨는 버릇이고 겨울 같으면 다시 잠드는데 지금은 훤해서 더 이상은 잠이 오지 않는다. 초저녁부터 잠들면 수면 시간은 똑같겠지만 겨울 같지 않고 늦도록 해가 지지 않으니 그 또한 어렵다. 가뜩이나 새벽잠이 없는데다가 내처 일어나는 바람에 수면시간은 단축되고 그래 늘 피곤하다.

동이 트기도 전에 일을 시작하는 농부를 보면 가당치 않은 투정이고 5월 말부터 7월 초순까지 일시적이기는 해도 평소 잠에 대한 핸디캡이 많은 나로서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일시적이기는 해도 찔레꽃가뭄처럼 오래 전부터 계속되어 왔으나 어느 정도 면역은 되었다. 잠은 갈수록 부족하고 작품 때문에 신경을 쓰다 보면 하루하루 타들어가는 농작물처럼 까칠해지나 해가 길어서 농부들에게는 작업시간이 늘어나는 유용한 기간이듯 피곤한 중에도 시간은 많아서 작품을 쓰거나 검토할 때는 제격이다.

찔레꽃가뭄의 특징은 해마다 지나간다는 것이다. 날씨는 절기 순으로 조금씩 달라지지만 찔레꽃이 피면서 먼지가 나도록 가물이 드는 일은 거르는 일이 없다. 가뭄이 들면서 한 달 만에 혹은 40일 만에도 비가 오는 그 차이는 있을지언정 찔레꽃가뭄은 예외 없이 찾아온다.나 역시 그 즈음부터 하지 때까지 잠 때문에 전전긍긍하지만 아득히 옛날 깔딱이며 숨차게 올라갔을 보릿고개를 생각하는 것이다. 아무려면 배고픈 그에 비하랴마는 아무리 자고 싶어도 훤해서 잘 수 없는 심정 또한 나로서는 꽤나 절박한 문제였다.

어느 날은 눈꺼풀이 무겁고 말하기조차 힘들 때도 있으나 나 또한 가물수록 뿌리를 넓히면서 물을 찾는 초목들같이 비를 기다리면서 내면의 세계를 넓히곤 한다. 작물은 또 가뭄 끝에 내리는 비에 더 잘 큰다고 했다. 자주 내릴 때는 웃자랄 염려가 있어도 가뭄 끝의 단비에는 그런 부작용이 없다. 극심할 때는 비가 와도 회복이 되지 못하고 지실이 들기도 하나 그런 일은 극히 드물기 때문에 잘만 극복하면 가뭄 끝의 단비로 더욱 풍성한 결실을 기약할 수 있다.

찔레꽃가뭄은 절박한 상황을 나타내는 말인데도 참 예쁜 뉘앙스다. 어쩌면 그래서 수리시절도 없던 그 옛날, 곡식이 타들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아득한 심정일 때도 사람들은 전설적 닉네임을 붙여서 어려움을 타개할 수 있는 여유를 창출한 게 아닐까. 기우제를 지내도 비가 오지 않을 때는 구황식물을 먹어가면서 오르고 올라도 고갯마루가 보이지 않는 영領을 넘었다는 게 전설처럼 아련해 온다.

그 세대를 살지 않은 이방인의 사치라 해도 할 말은 없으나 배고픈 게 어디 먹거리뿐이랴. 잠도 부족하면 굶주림 못지않게 힘들었지만 여름이면 치르는 홍역으로 생각하곤 했다. 엊그제 그야말로 먼지를 적실 만치 비가 와서 타는 듯한 갈증이 해소된 것처럼 찔레꽃가뭄으로 파급된 나의 찔레꽃불면증도 이따금 쏟아지는 단잠 때문에 견딜 수 있었다. 찔레꽃가뭄의 후유증은 만만치 않았으나 한 줄금 단비로 일시에 해소되는 것처럼 하지가 지나고 여름이 가면서 밤은 조금씩 길어지고 계절병인 찔레꽃불면증도 사라질 테니까.

 

이정희 시인·둥그레 시 동인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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