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9
한인숙
풀들의 환승역은 겨울이다
침묵을 묻고서 무심히 갈아타는 누런 사유의 행방
어디선가 메마른 바람 일어서고
발 저린 기억의 반쪽이 추억 깊이 체온을 찔러 넣고서
허공에 깊이 휘파람을 날린다
언젠가 푸르렀던 이름의 옆자리를 떠올리며
공백의 한끝,
묵정의 안부가 열렸다 닫힌다
이미 지상을 빠져나간 시간은 무효다
사리라도 쥐어진 듯 지난여름 들끓던 울음의 알들은
바람이 빠져나갈 때마다 늑골이 휘고
푸름을 버텨내던 태양은
벌레가 진화하기에 충분했다
이맘쯤의 풀은 갓 구운 허무처럼 파삭하다
바람 깊이 묻어나는 경련이 텅 빈 고요를 흔든다
사유들이 땅 밑으로 내려간 계절의 끝
오래된 역처럼 제 몸 한켠 날것들에 비워준,
지난밤 안개를 불러들였던 것도
풀들의 겨울나기였을까
시평)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풀’에 대한 시인의 사유가 참으로 잘 발효된 시입니다. 겨울이라는 환승역에서 갈아타는 누런 사유의 행방을 가만 가만 쫓아가다보면 자연의 순리가 한껏 펼쳐져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사유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은 “사유들이 땅 밑으로 내려간 계절의 끝/오래된 역처럼 제 몸 한켠 날것들에 비워준,/지난밤 안개를 불러들였던 것도/풀들의 겨울나기였을까”에서 새로운 반환점을 그려 넣고 있습니다. (조용숙/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