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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천주교의 요람 ‘신리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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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4.08.31 18:55
  • 기자명 By. 김윤진 기자
위치: 당진시 합덕읍 신리1길 43 일원 •합덕읍 신리 70-3 번지 이29필지 •면적: 36,061㎡  •도 기념물 제176호(2008.12.22. 지정) 다블뤼 주교 유적지.
주변현황: 기념관 (지하 2층, 지상 2층, 995.17㎡), 화장실(지상 1층, 128.10㎡), 성당(지상 2층,506㎡), 주교관(지상 1층, 65㎡), 구판장(지상 1층, 245㎡), 순례자 및 관리자 숙소(지상 1층, 134㎡), 사제관(지상 1층, 132㎡),식당(지상 1층, 320㎡), 약 500m 거리에 무명순교자의 묘(46기)위치해 있다.
 
신리성지는 조선 천주교의 요람이다 충청도 내포지방의중심부에 자리한 신리는 한국천주교회 초기부터 계속적으로 예비자, 신자, 순교자가 배출된 곳으로서 지리사적으로나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성지내 초가집은 소자선성인(1866 공주황새바위 순교)의 생가이자,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 다블뤼 주교(1866 오천 갈매못 순교)의주교관이었다. 디블뤼 주교는 이곳에서 성사를 집전하고 신잉을 가르치며 각지에 흩어져 있는 선교사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또한 선교사들의  교우들로부터 당시 교회의 상황과 순교사적들을 정리해 파리 외방전교회로 보내는 일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이자료들이 훗날 한국천주교 순교사의 토대가 된 다블뤼 비망기이다 1815년 지어진 다블뤼 주교관은 박해시대 여러차례 소유주가 바뀌었고 가옥의 구조 또한 개조를 거듭하였다.
1964년부터는 강당형태로 신축되어 한동안 공소로 사용되었다. 이후 본당중심의 사목이 강화되면서 방치와 노후화로 한때 성지의 흔적조차 사라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2004년 한국교회사 연구소의 사진을 바탕으로 복원됐으며 기둥과 뼈대는 그대로이다. 신리성지는 다섯분의 성인과 이름이 알려져 있는 33인 순교자 외에도 인근 대전리에 32기의 목없는 무명순교자의 묘, 14기의 손씨가족 순교자의 묘 해미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지는 3인의 묘가 있다.
신리성지 특징으로 본다면 손자선성인의 생가로 성인이 28세의 나이로 순교하기까지 살던곳이며, 다블뤼주교가 10여년을 은거하며 선교활동을 하던 주교관이다 또한 한국의 두 번째 사제 최양업신부를 비롯한 션교사들의 근거지이며, 교리서 번역 및 편찬, 조선천주교회 사료들을 수집 전손하던곳이며 103위 성인, 124위 복자 탄생의이론적 근거을 마련 했고, 다섯분의 성인(다블뤼 주교, 오매뜨르신부, 위엥신부, 손자선 성인)과 많은 교우들이 순교를 위해 잡힌곳이며, 목없는 무명순교자, 손씨가족 순교자를 비롯한 무명순교자의 묘가 있는곳, 그러므로 조선 천주교회 초기부터 박해시대 교우촌이자 수많은 순교자들의 출신지이다.
 
◆ 100년 넘는 한국 교회의 산 증인
 
합덕 성당은 지역 충청도 지역 최초의 본당으로 내포 평야에 복음을 밝힌 지 100년을 넘는 한국 교회의 산 증인이 된 유서깊은 성당이다.
이 성당은 엄밀히 말 하자면 성지는 안니지만 신앙의 유산을찾기에 충분한 교회지다. 사제40여명, 수녀, 수사 약 70명을 배출한 성소의 밭이다.
1890년 퀴를리에 신부와 파스키에 신부가 내포지역에 파견되어 퀴를리에 신부는 양촌(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거처하고, 파스키에 신분는 간양골(예산군 예산읍 간양리)에 거처하게 되었다. 이로써 내포지역의 본당이 1866년 병인박해 이후 24년 만에 2개의 본당으로 복설(復設)되었다. 그러나 1866년까지의 본당과 이 때 복설된 본당과의 성격은 차이가 있다. 전자(前者)는 몇 개의 군을 관할하는 넓은 의미의 지역본당이었던 반면에 후자는 현재의 본당과 관련되는 사목 행정상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양촌 본당은 1895년, 드비즈 신부에게 공세리 본당을 분할해 주었다. 공세리 본당은 다시 1897년, 공주본당을 분할해 주었다. 양촌 본당은 새로운 본당 중심지를 물색하게 되었다. 당시 퀴를리에 신부는 1898년, 합덕이 적당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당을 매입해 사제관 겸 성당을 짓고 이듬해 곧 1899년 합덕으로 이전했다. 이로써 미침내 합덛본당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합덕본당의 제1대 신부인 퀴를리에  신부는 1904년까지 즉 1890년 양촌본당 부임으로부터 14년간, 1899년 합덕본당 이전으로부터 5년간 재임하면서 교세 확대에 큰 역활을 했다. 
퀴를리에 신부는 1904년 5월, 공주본당(189 7년 공세리 본당에서 분리 독립)의  제3대 주임신부로 부임해 갔다.
퀴를리에 신부는 파리에서 자금을 들여와 합덕성당 주변 300만평의 토지를 구입,싸게 소작료를 받으며 교유촌을 형성하였다. 또한 여기에서 나오는 소작료로 충청지역 각 성당을 신축하였고 명동성당의 신축자금까지 관여하게 되었다. 현재의 합덕본다으로 정착과정이 시작된 것은 1902년 부터라고 할 수 있다.
합덕본당의 제2대 신부는 홍병철(루가, 1874-1913) 신부가  2년 동안 (1904.5-1906. 5) 재임하고 옥천본당으로 이임함에 따라 제3대 신부로 크렘프 신부가 봉직하였다. 크렘프 신부는 1906년 5월부터 1914년8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본국으로 소환되기까지 8년 동안 교세 확대에 노력해 1914년에는 아산, 예산,서산,당진 등 4개 지역에 25개 공소를 설립하고, 신자수도 2220명으로 증가 시켰다.
크렘프 신부는 매기학교 운영 등 일반교육과 교리교육에도 많은 노력을 하였다.
크렘프 신부가 1914년 징집된 후 라리보 신부가 그 해(1914) 9월부터 1917년 5월까지 제4대 합덕본당의 주임신부로 재임하였고, 박우철 신부가 1917년 10월부터 2년 동안 제5대 주임신부로 활동을 하다가 1919년에 세계1차대전 종전(終戰)으로 돌아 온 크렘프 신부에게 인계하였다. 크렘프 신부는 제6대 본당 신부로 다사 부임했다가 1921년 5월,서울 명동 본당의 보좌 신부로 전암하였다. 후임으로 제7대 합덕 본당 신부로 임명된 선교사는 페랭 신부였다. 페랭 신부는 부임 후 1950년 8월 공산군에 의해 납치되어 행방불명이 되기까지 29년간 합덕본당에서 활동하면서 전교, 교육, 사회사업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기간 동안에 교새가 크게 확대되고, 1928년 5월에 예산본당을 분할해 주고1939년 5월에는 다시 당진본당을분할해 주었으며, 1929 10월에는 새 성당을 신출 낙성하였다. 합덕본당은 퀴를리에 신부가 터를 닦고,크렘프 신부가 정착의 기틀을 세우고,페랭 신부가 성장의 초석을 이룩했다고 할 수 있다. 합덕본당은 ‘내포교회-충청도 본당-양촌 본당-합덕 본당’이라는 일련의 교회 발전사적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 내포지방의 초기 교회 공동체 ‘원머리 성지’
 
원머리 성지는 당진시 신평면 한정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평 성당에서 북쪽으로 3㎞정도 떨어진 곳이다. 원머리라는 지명은 바닷가에 둑을 쌓기 시작한 곳이라는 뜻에서 나온 언머라가 변형된 것이며 염전과 농사를 주로하며 살던 박씨, 양씨, 조씨, 문씨 등이 신앙을 받아들여 병인박해 때는 이미 상당히 큰 교우촌으로 성장하였다. (원머리, 에서 유래되어 송악읍 도원리에서 보운리가는 갯벌 막은 제방을 지금도 원둑이라고 불러지어 온다.)   
신평 매산리에 사시는 이흥갑(천주교 농민회 지부장)께 감사 드립니다(취재협조).
순교자 박태진(마티아)과 박선진(마르코1866년부터 시작된 병인박해로 말미암아 마침내 이곳에도 박해의 광풍이 몰아쳐 1868년까지 3년야에 걸친 박해로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게 되는데 지금 한정리에 유해가 안장 되어있는 박태진(마티아)과 바선진(마르코)은 무진년(1868년) 수원 감옥에서 순교한 분이다. 순교자 바선진(마르코)의 아우 박 셉은 1920년대에  형의 순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마르코는 모친의 뜻을 따라 착실히 수계하면서 무친과 함께 동네 교우 교우들과 연락하고 지냈다”신부님이 오시어 성사를 성사를 받으려항면 부친이 금해 고로 이를 마음속으로 꺼리더니 무진년(1868년)에 수원 포교에서 체포돼 잡혀 갈 때 그는 부모에게 하직하며 위로하되 “거기가서 중면 육정의 박절함이 없을까만은 주 명대로 위주하여 죽는 것이구령에 편한 일이라, 부디 염려마시고 훗날을 조심하십시오”라고 한 다음 그 삼촌 형 마티아와 함께 구원옥에 갇혔다. 
포교들은 배교를 요구하며 심하게 매질하고 고문하였다. 모진 고문을 당 할 마티아가 이를 못 이겨 배교하려 하자, 마르코가 “천주를 배반하고 영벌을 받으려 하느냐”고 형을 깨우쳐, 이에 마티아는 배교한 것을 뉘우치고 옥에 갇힌 지 15일 후 같이 순교하였는데 죽은 후 시체를 창 이곳 원머리에 안장하였다. 이때 마르코의 나아는 33세였고 마타아의 니이는 52세였다.
포졸들이 원머리에까지 찾아오게 되었던 경위를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혹시 서영삼의 부친 서씨의 간접적인 개입이 있었을 개연성이 추정된다. 서씨는 마을에 살던 한 총각이었다는 구전도 있고 포졸 출신이었다는 구전도 있는데, 그는 신지들이 포졸들로부터 압송하고 얼마지나 박씨집에 찾아와 순고자 박 머루코의 여동생과 결혼을 약속받는 조건으로 두 순교저의 시신을 찾아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사전 계획이 있었는지, 아니면 결혼하고자 갑자기 용기를 발휘했는지 명확하지 않다. 아무튼 그는 순교자들의 시신을 찾아왔고, 결국 순교자의 여동생과 결혼하였고 신지가 되었다. 그가 여사울에서 본래 살아왔다고 전해지고, 원머리에 살디가 여사울로 이사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묘소는 근래에 으르기까지 두 손교자의 묘 바로 옆에 위치해 있었으나 지금은 이장되었다. 사씨의 아들 서명삼은 원머리 박씨가문에 가끔 왕래했으며 그를 통해서 증언을 들었던 이들이 생존해 있다.
 
◆ 무명순교의 묘, 손자선 정인 가족묘
 
1972년 봄 합덕읍 대전리 성인 손자선의 선산을 과수원으로 개발하는 과정에서 연고자 없는 고총이 파묘 됐는데 작업중 이상하게도 문묘마다 목이 없는 시신과 묵주가 출토되었다. 묵주의 수와 양은 바가지에 가득할 만큼 있었다. 구전에 의하면 대원군이 천주교 꾼들을 목베어 죽이고 목은 수효를 확인하기 위해 가져가고 시신만을 버렸다고 한다. 32기의 시신은 그당시 손석윤씨가 10여명의 교우를 데리고 와서 사과 상자에 담아 인근 1㎞ 동쪽으로 있는 공동묘지에 일렬횡대로 6봉분에 나누어 합장 하였다.
1985년 4월 대전리에 있는 손자선 성인의 선산이 공장용지로 개발됨에 따라 김병국(77·2002현재·대전리),김영기(75·2002현재,대전리),최동철,(77·2002현재)이 합덕읍 대전리 공동묘지로 이장했다.
김병국는 신리출신으로 어린시절부터 전해들은 애기로 이지역 대부분의 땅이 성인 손자선의 땅이었고 손성인의 묘와 많은 순교자가 아곳에 묻혀 있다고 전해들었다. 특히 대전리 128-8에 있는 10수기의 무덤은 손씨가문의 치명자 묘라는 사실을 구전으로 들어 알고 있던중 서종순과 상기 동료와 함께 이장했는데 파묘시 많은 십자가가  나왔다.
 
◆ 원머리의 순교자
 
이외에도 순교로 신앙을 증거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려낸 원머리(신평) 출신 19분 순교자들의 기록을 치명일기와 치명사적은 이렇게 적고  있다. 양 도미니코 회장 박 회장 유서방, 김동 4인은 정묘년(1867년)에 홍성(홍주) 감옥에서 순교하였으며, 최 베드로, 김 루치아, 김 마리아, 원 아나스타시아 4인은 해미에서 순교하였고, 원씨, 김 마리아 2인이 홍주에서 정묘년에 순교하였고, 최 아우구스티노, 홍 베드로닐라, 양정수,양아우구스티노,홍 베드로, 한 마티아, 6인이 병인년(1866년)에 홍주에서 순교 치명하였으며,같은 해 김백신이 해미에서 순교하였으니, 이 곳 원머리에 얼마나 큰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던가를 알 수  있으며, 순교자들의 신심이 얼마나 깊었던가를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 당진시는 물론, 내포지역 전체가 세계적인 성지로 발전하기를 기원하면서 특집 마감 합니다. 다시 한번 신평 매산리 천주교 지부장 이흥갑씨께 감사드립니다 ‘취재협조’)
당진/김윤진기자 yj55410@dailycc.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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