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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새들 음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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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3.06.24 18:29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이정희 시인·둥그레 시 동인 회장

요즈음 우리 집 뒤뜰에서는 음악회가 자주 열린다. 음악회는 대부분 밤에 열리지만 녀석들은 첫새벽부터 야단이다. 음력 4월 말은 아침에 나온 애기가 저녁이면 인사한다고 할 정도로 해가 길다.

밤은 또 그만치 짧아서 잠들만하면 아침이고 녀석들 때문에 잠을 설치는 게 일이지만 음악을 들으면서 시작되므로 오히려 활기찬 날이 되곤 했다.

처음 등장한 목소리는 아주 말끔했다. 박자는 물론 음정도 정확하고 무엇보다 리듬이 맞았다. 다섯 마디까지는 3박자의 왈츠 풍이다가 여섯 번째는 4박자로 바뀐다.

녀석들 세계에서는 제법 프로급에 속하는 듯 원숙한 실력이다. 그 다음 생소한 리듬이 한 번 나왔을 뿐 나머지는 정확하게 이어졌다. 아니 그것도 단조로운 음을 탈피하기 위한 불협화음이었던 걸 보면 나름대로 경지에 이른 것 같다.

곧 이어 아주 서투른 목소리가 들렸다. 멜로디는 앞서와 같았으나 음정이며 박자가 불안했다. 앞서 나온 소리가 자신 있게 거침없이 나왔던 것에 비해 틀릴까 봐 조심하는 듯 조마조마하게 이어지고는 그대로 끝이었다.

갓 입문한 것 같은 초보자는 결국 한 소절도 채우지 못했고 퇴장해 버렸는지 더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 다음 세 번째 목소리는 초보 과정은 면한 듯 제법 원숙한 리듬이다. 맨 처음 녀석처럼 프로급은 아니어도 중급 과정은 뗀 듯 그만하면 잘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음악회가 아닐 수도 있겠다. 아니 여러 마리가 모일 때 뒤죽박죽인 소리를 들을 때는 천연 대화를 하는 기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들은 걸 노래라고 거침없이 생각한 이유는 한 마리씩 나와서 지저귀고는 다음 타자에게 바톤을 넘겨준 까닭이다. 노래가 아니어도 무슨 무슨 발표회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리듬이 착착 맞았던 것을 보면 그렇게 볼 수밖에 없다.

언젠가 들을 때는 또 맨 처음의 프로급 새가 나머지 새를 가르치는 듯했다. 한 두 번이면 차례로 나와 뽐낸다고 생각했겠지만 언젠가는 서투른 녀석이 하는 도중에 프로급 녀석이 중간에 잠깐 끼여서 합세를 했기 때문이다.

파트별이었다면 중급과 프로급 두 녀석이 어우러졌을 텐데 서투른 녀석의 차례가 될 때 소리가 자주 뒤섞였다. 엄마가 아들을 가르치는지 혹은 선생님과 제자일 수도 있으나 새도 배워야 노래가 된다는 게 자못 새롭다.

막연한 추측이고 빗나갈 수도 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뭐랄까, 아침마다 새 소리를 듣는 자체가 즐겁다. 일찍 깨다 보면 종일 피곤하지만 듣는 순간에 떠오르는 온갖 상상 때문이다.

잘 하는 녀석이 제법 긴 곡을 명쾌하게 끝냈을 때는 프로급 음악을 듣는 것처럼 속이 다 시원했으나 노래라고 표현하는 건 지나치다는 말에 기분이 섬뜩했다.

노래보다는 우짖는 거였을까. 심심파적으로 노래한다고 단순히 표현하는 건 피 맺히도록 울면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에 대한 모독이었던 걸까.

가시나무 새처럼은 아니지만 버금갈 정도의 아픔을 보기는 했다. 엊그제 이웃집 건물에 들어서는데 아주 명랑한 새소리가 들렸다.

도심에서 더구나 3 층 건물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기쁨에 한동안 귀를 기울였다. 숲속에서 우짖는 소리도 그렇게 맑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될 만치 아름다운 여음에 팔려 있다가 나중에야 빠져 나오려고 몸부림치는 소리였음을 알았다. 나보다 먼저 온 친구가 유리창 사이에 낀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얼마 후 친구 몇몇이 왔다. 모인 김에 꺼내 주려도 워낙 높아서 어떻게 방법이 없다. 손이 닿지 않아서 몇 차례 시도해 보다가 그만 포기해 버렸다. 그 동안도 소리는 여전히 들렸고 비할 데 없이 고왔다.

갇혀서 물 한 모금 먹지도 못했을 텐데 목이 쉬도록 울어대는 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기억에 생생하다. 그리고는 저녁 때 가서야 소리가 그쳤고 죽어버렸는지 이후로 잠잠했다는 말에 한동안 마음이 아팠다.

유달리 해맑았던 노래는 살려 달라는 비명인데 아름다운 새소리를 감상할 수 있겠다고 좋아만 했다. 세상 최대의 아름다움은 더할 수 없는 고통에서 나오는 걸까. 살기 위한 몸부림을 세상에 다시없을 노래라고 착각했으니 삶의 공식은 그런 것이었던가. 그렇다면 나도 아름다운 노래 한 편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필 죽어가는 부르짖음에 감동한 건 언짢은 일이나 그 순간에도 특별한 감동을 준다면 얼마든지 견딜만한 삶을 생각한 것이다.

어쨌든 새 소리는 아름답다. 초여름 벽두에서 하늘을 쪼아 물며 구슬 같은 노래를 엮을 때도 아름답지만 유리창에 갇힌 새처럼 피가 맺히도록 울면서 고통을 호소하는 여음은 더더욱 감동적이다.

새소리뿐이 아닌 전반적인 삶의 노래는 고통의 악보에 새긴 음표라는 걸 숙지하면서 하루의 장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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